광주소식

이광이 작가와 떠나는 80년 5월 ③


  • 이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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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20-05-21 12:34:53

    Ⅲ. 무장하는 민중(21일)

    21일은 부처님오신 날, 열흘의 항쟁 기간 중에서 가장 긴 날이며 가장 비극적인 날이다. 새벽 4시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했다. 이 소식을 듣고 밤새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이던 시민 수십만 명이 모여들었다.

    4시30분 광주 KBS 건물이 불탔다. 계엄군은 20사단을 증파하여 광주로 내려 보냈다. 오전 8시 광주공단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금남로는 시민들로 가득 찼고, 도청 앞 광장에는 군용 헬기들이 떠다녔다.

    상무관에 주둔하던 제11여단 군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실탄이 지급되었다. 11시를 넘기면서 시민들은 10만에서 최대 30만 명까지 불어났다. 차량 100여 대가 군중들 사이에서 시위에 동참했다. 간격은 점차 좁혀져서 시민과 계엄군의 격차는 몇 십 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1980년 5월21일 계엄군에 희생된 광주시민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낮 12시58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몰고 온 해병대용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했다. 장갑차는 공수부대원들의 대열을 흐트러뜨린 뒤 광장을 빠져나갔다. 이 와중에서 계엄군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

    잠시 뒤인 1시 정각,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러 퍼졌다.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 그 순간, 수백 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러 퍼졌다. 시민들을 향한 조준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군인들은 ‘앉아 쏴’, ‘서서 쏴’, ‘엎드려 쏴’ 자세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총탄을 난사했다. 시민들은 픽픽 쓰러졌고, 금남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집단발포는 10여분 동안 이어졌다. 일련의 사격이 끝나고 1시10분께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갑자기 5~6명의 대형 태극기를 든 청년들이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길 중앙으로 뛰쳐나갔다.

    도청 주변의 건물에 숨어 있던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 가해 청년들은 모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 몇몇이 뛰어나와 쓰러진 이들을 수습했다. 바로 뒤이어 또 다른 청년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와 시위를 하다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후에도 똑같은 상황이 여러 번 펼쳐졌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총에 맞아 쓰러져 갔다. 이 끔찍한 광경은 주변의 시민들이 뛰쳐나오려는 사람들을 급하게 뜯어말리고서야 멈추었다.

    1시30분, 시위대 쪽에서 장갑차 한 대가 웃통을 벗은 채로 “광주만세”를 외치는 청년을 싣고 도청광장으로 돌진했다. 그 청년도 계엄군의 총격으로 머리가 고꾸라지며 죽었다. 조준사격은 시위대에게만 가해진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행인과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도 총을 맞았다.

    계엄군은 캘리버 50 기관총을 난사하고, 헬기까지 동원하여 총탄을 퍼부었다. 이렇게 전남도청 앞에서 벌어진 집단발포 등 21일에 발생한 계엄군의 발포로 최소 54여명이 사망하고 500 여명이 부상당했다.

    ▲1980년 5월21일 광주시민 수십만명이 계엄군에 맞서 금남로에 가득 찼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계엄군의 발포는 공수부대의 주둔지였던 전남대학교 앞에서도 벌어졌다. 이날 정오 무렵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고 실탄을 발포했다. 최소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8개월의 임산부였던 최미애씨(23)가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 총을 맞고 태아와 함께 숨졌다.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시위대는 집단발포 직후 각 방면으로 흩어져 무기확보에 나섰다. 오후 2시35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군용트럭과 장갑차 수십 대를 획득했다. 지원동의 탄약고에서는 TNT를 입수했다.

    광주에서는 이미 무기가 회수된 뒤였기 때문에 화순, 나주, 영암, 장흥, 보성, 화순, 해남, 영암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경찰서와 무기고를 점거하고 대거 무장했다. 시민들은 이렇게 시민군이 되었다.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앞 집단발포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민군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오후 3시50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무장한 시민군은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했다. 학생들은 전남대 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를 설치했다. 오후 5시30분 시민군의 유례없는 저항에 당황한 계엄군은 총을 난사하며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퇴각했다. 마침내 저녁 8시경 텅 빈 도청을 시민군이 장악했다.

    이날 밤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이름으로 자위권 발동을 천명하는 담화문이 발표되고, 각 공수부대원들에게 지시가 하달되었다. 자위권 발동은 발포명령이었고, 결국 이후에도 무수한 희생을 낳게 된다.

    ▲이광이 작가


    베타뉴스 이완수 기자 (700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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